북적임 없는 길, 비와 안개가 만든 신비로운 풍경 속을 걷는 여정으로 뉴질랜드 밀포드 트랙은 자연과 깊이 연결되는 감각을 깨우는 길입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트레킹이 아닌, 마음을 비워내는 조용한 성찰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밀포드 트랙 예약이 곧 여정의 일부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그레이트 워크 중 하나인 밀포드 트랙은 단순한 트레킹 루트가 아닙니다. 이 여정은 ‘걷는 것’이 아닌 ‘예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워낙 인기가 많은 코스인 만큼, 트레킹 시즌(10월~4월)에는 입장 인원이 엄격히 제한되며, 예약은 몇 달 전부터 경쟁적으로 진행됩니다. 심지어 오픈과 동시에 매진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밀포드 트랙 예약 시스템은 뉴질랜드 자연보존부(DOC)의 관리 하에 운영되며, 정해진 방향(Te Anau → Milford Sound)과 일정에 따라 하루 정해진 인원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약 과정부터 제한과 규칙이 많은 이유는, 이 생태계가 지나치게 훼손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트랙을 걷는 사람들은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치열한 준비와 선택을 거쳐 이 길 위에 선 ‘선발된’ 이들입니다. 밀포드 트랙의 진짜 시작은 짐을 싸기 전, 인터넷 창 앞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와 함께 걷는 법
많은 사람들이 밀포드 트랙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길’이라 부르지만, 정작 이 길을 걷는 동안 맑은 날씨를 기대하는 건 무모한 일입니다. 이 지역은 연평균 강우일수가 200일 이상으로, 밀포드 트랙을 걷는 대부분의 시간은 비 속에서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 비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맑은 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품고 있습니다.
비가 내린 뒤 흘러내리는 수천 개의 폭포,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안개, 젖은 이끼와 돌 사이로 퍼지는 생명력. 이런 풍경은 오직 비와 함께할 때만 만날 수 있는 밀포드의 진짜 얼굴입니다. 트레커들 사이에서는 “여기선 비가 축복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밀포드 트랙에서는 방수 자켓, 방수 커버, 속건성 의류는 기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비를 이겨내려 하지 않고, 함께 걷는’ 마음가짐입니다. 그 순간, 비는 방해물이 아니라 여정의 동반자가 됩니다.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생태 보고
대부분의 트레킹 코스가 풍경 중심이라면, 밀포드 트랙은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생태 보고입니다. 이곳은 뉴질랜드 남섬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손길 없이 고립된 채 진화한 독특한 생태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여겨볼 만한 존재는 키아(Kea)라는 앵무새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앵무새로, 지능이 높고 호기심이 많아 종종 트레커들의 배낭을 열거나 장비를 물어뜯기도 합니다. 또한 블루덕(Whio)이나 모하우(Mohoua) 같은 멸종위기 조류들도 운이 좋다면 마주칠 수 있습니다.
밀포드 트랙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경치를 보는 것을 넘어, 인류가 거의 손대지 않은 생물다양성의 정수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자연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우리가 자연에 얼마나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는 기회가 되죠. 밀포드 트랙은 '생태 감수성'이라는 또 하나의 감각을 깨우는 길입니다.
밀포드 트랙이 남기는 감정의 여운
밀포드 트랙을 걷는 4일간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이 길을 마친 후엔 예상치 못한 감정이 남습니다. 그것은 성취감과는 조금 다릅니다. 비와 바람, 고요한 숲과 야생의 숨결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 그 시간은, 무언가를 ‘이뤘다’기보다는 ‘비워냈다’는 느낌을 줍니다.
트레킹이 끝나는 마지막 지점인 샌드플라이 포인트(Sandfly Point)에서 배를 타고 밀포드 사운드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조용히 뒤를 돌아봅니다. 거창한 마무리 인사도, 감격의 눈물도 없이, 그저 조용히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만이 남습니다.
밀포드 트랙은 끝나고 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 여정입니다. 이 길을 걷고 난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말 없는 공감, 자연과 다시 연결된 느낌, 그리고 그 속에서 찾은 ‘조용한 자신’. 그런 여운이 오래도록 마음을 적십니다. 그래서 밀포드 트랙은 ‘다녀온 여행지’가 아니라, ‘다시 돌아가고 싶은 기억’으로 남습니다.